스크린샷 2021-05-05 오후 5.41.47

존엄실천을 위한 직무역량 : ‘물음의 n승’으로서 캐물음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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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실천을 위한 직무역량 : ‘물음의 n승’으로서 캐물음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존엄실천을 고민하고, 존엄실천을 자신의 업으로 생각하는 실천가와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직무역량은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의 의미를 그때그때마다

캐물으면서 실제로 행동하는 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존엄실천은 존엄을 지향한 실천이며, 존엄실천은 도래할 존엄을 지향한 실천이다.

존엄은 도래할 존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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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엄실천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직무역량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많은 시민들은 자기 자신의 존엄한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품위있는 생존을 위해 일터에 가고,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의 존엄한 삶을 넘어, 이웃의 존엄한 삶을 고민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동시대의 시민들이 그리고 미래세대의 시민들이 자신의 존엄을 침해당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한 삶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실천가’ 혹은 ‘활동가’라고 부른다. 이처럼 어떠한 이유와 조건, 자격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열망하고 있는 주체들을 우리는 보통 ‘실천가’ 혹은 ‘활동가’라고 부른다. 인간다운 삶의 권리가 바로 인권이고, 인권의 본질적인 의미는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의 권리’를 당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을 본래적이고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엄실천은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위한 실천이고, 인권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2. 존엄실천을 위한 4가지 핵심개념

존엄실천을 위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캐물어야 하는 주요한 4가지 개념이 있다. 그것은 ‘존엄’, ‘실천’, ‘역량’ 그리고 ‘캐물음’이다.

(1) ‘존엄(dignity)’은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이 높고 엄숙함’이다. 많은 이론가와 실천가들은 존엄을 ‘인간다운 삶의 가치’, ‘인격성’, ‘인간의 목적성’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존엄에 대해 기존의 제시된 일련의 설명만으로는 존엄이 가지고 있는 그 깊은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을 보다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감히 범할 수 없음’이라는 의미로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의 존엄이란 단지 다른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 혹은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 등의 설명만으로는 존엄의 본래적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데에 분명 한계가 있다. 우리는 존엄의 그 깊은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판단력 비판』에서 소개한 존엄의 의미를 참고하고자 한다. 칸트가 본래 미적 경험으로서 ‘숭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쓴 글이지만, 우리는 이 내용을 ‘존엄’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적용해보고자 한다.

‘단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존엄하다고 부른다. 단적으로 크다는 것은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 큰 것이다. 존엄은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아무런 인식원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다. 존엄하다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이 작은 것이다. 즉 존엄하다는 것은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각과 이성의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존엄하다는 것은 객관화할 수 있는 어떠한 규정도 가져서는 안된다.’ (칸트, 『판단력 비판』, 253~260쪽.)

이처럼 존엄은 그 무엇으로도 대상화시킬 수 없는 ‘무한’의 의미, ‘무한을 무한화’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엄실천’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더 근원적인 것을 발견하거나, 더 높고 고상한 것을 성취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기존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은 장악하고 성취할 수 있다는 태도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음’이라는 무한의 의미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지금 내가 이렇게 이런 방식의 실천이 혹여나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을 감히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하면서 실천하는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존엄이란 더 근원적인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며, 존엄이란 더 고결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삶의 방식으로 규정되어서도 안된다. 존엄은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음 그 자체이다. 오히려 존엄은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림으로 관계해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2) ‘실천(praxis)’이란 ‘생각한 바를 실제로 행함’이다. 실천이라는 개념 자체안에 이미 내재적으로 생각과 행함이 통합되어 있다. 실천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생각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생각함 없이 실천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론과 실천’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으로 통합하고자 한 시도는 사실상 헛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천한다는 것은 이미 실제로 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생각한 바로서 이론적인 내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계절이라는 개념의 타당성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계절만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온전히 다 존재할 때 비로소 사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닭과 달걀의 관계도 어느 한쪽이 없이는 다른 한쪽이 존재할 수 없는 관계이다. 닭과 달걀은 서로가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처럼 실천은 ‘생각함’과 ‘행함’이 분리불가능한 관계로 상호의존적으로 공속되어 있는 개념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실천이라는 개념을 실제로 행함으로만 이해했다면 그것은 실천의 반쪽만을 이해한 것이며, 어쩌면 실천이 가지고 있는 온전한 의미에 대해 빙산의 일각처럼 아주 일면적인 앎만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실천을 한다는 것은 제시된 규정이나 규칙, 매뉴얼에 따라 실제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행해야 할 것을 생각하여야 하며, 내가 왜 이런 행동을 수행하고 있는지,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 자신의 삶과 동료들의 삶에 또 우리 이웃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 생각한 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한 바가 없이는 실제로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강조하듯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한 바가 없이 실제로 행하게되면 언제나 악을 범할 가능성에 놓이게 된다. 악은 악을 실제로 행함 이전에, 악이 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천주체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한 바가 없이 주어진 규칙과 절차, 매뉴얼에 따라 실제로 행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영혼을 가진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이거나 로봇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면 인간노예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며 실천하는 우리시대 실천가와 활동가는 누구도 인간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이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하면서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였기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며, 자신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한 바가 무엇이었기에 그런방식으로 실제로 행하는지에 대해서 타당하게 근거를 들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 인간노예가 아닌 영혼을 가지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존엄한 실천가, 존엄한 활동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3) ‘역량(Capability)’이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 가 주체 안에 ‘전면적으로 내재된 실천의 힘’으로서 ‘아레테(arete)’를 통해 이야기했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후 역량(Capability)개념은 아마티아 센(Amartya Sen, 1933~)과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존재역량으로 지구적 차원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역량은 기술적 능력(competence)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존재역량(Capability of Being)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술적 능력도 반복과 학습 그리고 훈련이라는 숙련의 과정을 통해 주체안에 내재화된 힘일 수 있다. 그러나 기술적 능력은 그 기술이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안에서만 유효한 힘을 갖는다. 예를 들어, 요리를 잘 만드는 능력은 수영장에서는 발휘되기 힘든 능력이며, 암을 치료하는 능력은 암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사람에게서는 발휘되기 힘든 능력이며, 옷을 잘 만드는 능력도 스키장에서는 발휘되기 힘든 능력이다. 반면, 존재역량은 주체가 존재하는 한 언제 어느 곳에서나 발휘될 수 있는 힘이다. 상황판단력, 통찰력, 공감력, 관계형성력, 회복력, 자기성찰력, 자기현존력, 생태적 공존력 등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지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든지 발현되거나 적용될 수 있는  역량이다. 이처럼 기술적 능력과 존재역량은 서로 중첩되는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힘이다.

(4) ‘캐물음(엑세타시스.exetasis)’이란 마땅히 생각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에 대해 ‘물음의 n승’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가 자신의 존재이유로, ‘셈할 수 없는 존재의 몫’으로서 평생을 통해 수행해 온 삶의 방식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다운 삶이란 캐물음을 수행하는 삶이라고 보았으며, 캐물음을 통해 인간은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온비잉(On-Being)할 수 있다고 보았다. 캐물음이란 어떤 사안에 대해 질적으로 깊이 생각하거나, 양적으로 여러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캐물음이란 마땅히 생각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에 대해 ‘물음의 n승’을 수행하는 것이다. ‘존엄실천’에 있어서 캐물음이 중요한 역량인 이유는 바로 ‘존엄’의 본래적인 의미 때문이다. 존엄이란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날마다 되풀이 되는, 그러면서도 차이를 만드는 실천의 장으로서 일터(직장, 조직)에서 함께하는 동료주체의 존엄과 지역사회에서 함께하는 이웃주체(주민, 장애인, 어르신, 청소년, 아동 등)의 존엄을 감히 범하지 않으면서 함께하기 위해서는 바로 캐물음의 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오직 다이아몬드만이 다이아몬드를 세공할 수 있는 것처럼,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한 존재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감히 범할 수 없음에 대해 ‘물음의 n승’으로서 캐물음의 역량이 요구된다. 캐물음의 역량이 요구된다는 표현은 당위적 규범적 요구라기 보다는 ‘강물은 흘러야 강물이다’와 같은 의미의 표현이다. ‘강물이 흘러야 강물’이라는 것은 강물에게 ‘흘러야만 한다’고 당위적인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 그자체로 본래적이고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그 자신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처럼, ‘감히 범할 수 없음’이라는 존엄의 의미를 대상화시키지 않고 온전히 관계맺고 함께하는 것은 존엄을 한계 짓거나 규정하지 않으면서 ‘물음의 n승’으로서 캐물음을 하는 것이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한 주체의 자연스러운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런데, 캐물음은 물음의 n승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캐묻다가 언제 실천을 하냐?’고 많은 실천가와 활동가들은 이견을 제시하면서 반박을 한다.

그러나 오히려 되묻고 싶다. ‘존엄은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음인데,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의 의미를 그때그때 실천의 순간마다 캐묻지 않고서 어떻게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과 관계하는 실천이 가능하냐?’고 말이다. 열심히 캐물으면 존엄의 의미를 파악하고 장악해서 존엄하게 실천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존엄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이 아닐 것이다.

3. 존엄실천을 위한 실천역량으로서 캐물음의 역량

실천가와 활동가들에게는 실천의 장인 일터와 지역사회에서 교묘하고 세련된 권력의 미시물리학이  우리의 존엄을 끊임없이 침해하고 존엄을 지배하고자 할 때 그 힘에  압도당하고, 무너지고, 상처입지 않도록, 불복종의 기술로서, 불순종의 기술로서, 탈예속의 기술로서 캐물음의 역량이 요구된다. 우리의 사회적관계는 대칭적이고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이다. 우리는 언제나 항상 권력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실천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한 권력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가 존엄을 침해당하지 않고 존엄한 삶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순간 순간 캐물음이 요구된다. 캐물음은 자기실천으로서 단수적 주체의 캐물음으로 시작하지만, 동료주체들과 또 이웃주체들과 더불어 함께 복수적 캐물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캐물음은 문제를 해결하는 실천의 힘이면서, 지배하려고 하는 힘에 굴복당하지 않는 자기극복의 힘이며, 협력적 극복의 힘이다. 이러한 캐물음은 우리에게 강제되는 당위적인 규범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 자신과 동료 및 이웃의 존엄한 삶을 위해 차마 캐묻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삶의 방식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반문이 들수 있다. 존엄은 감히 범할 수 없다고 했는데, 아무리 정교하게 작동하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고 할지라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을 침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것이 인간인 우리만이 경험하는 존엄의 이중성이다. 존엄한 신은 그 어떤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도 존엄을  침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공동창조자이면서도, 존엄을 침해당할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신과는 다른  존재방식을 갖는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은 감히 범할 수 없지만, 항상 범해질 수 있다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 존엄의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또한 존엄실천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존엄실천을 고민하고, 존엄실천을 자신의 업으로 생각하는 우리 시대 실천가와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직무역량은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의 의미를 그때그때마다 캐물으면서 실제로 행동하는 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캐물음의 역량은 일터와 지역사회라는 실천의 장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기술적 능력과 함께 구비되어야 할 직무역량이다.

4. 캐물음의 역량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방법 

그럼, 존엄실천을 위한 이러한 캐물음의 역량은 어떻게 회복하고 강화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일터와 지역사회를 존엄실천의 장으로 전복(subversion)하는 것이다. 전복의 사전적 의미는 ‘차나 배 등을 뒤집는 것’이며, ‘사회 체제가 무너지거나  정권  등을  뒤집어  엎는 것’이다. 그러나, 전복을 의미하는 subversion의 어원을  보면 ‘sub’는 단순히 아래가 아니라 ‘본질과 기원으로 나아감’을 의미하는 ‘going to the origin’이다.  그리고 ‘version’은 ‘to turn, to back’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의 실천에 있어서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 본래적인 것은 바로 ‘감히 범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인 것이다. 따라서 전복적 실천이란 ‘인간 존엄’이라는 본래성으로의 전환을 통해 ‘인간 존엄’이라는 본래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인간 존엄’이라는 본래성으로부터 현실을 ‘존엄사회’로 변화시키고 전환시키는 실천을 의미한다.

존엄실천을 위한 캐물음의 역량은 실천의 순간순간마다 본래성으로의 전환을 통해 현실과 관계하며, 존엄의 관점으로 실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다. 수영은 오직 수영장에서만 배울 수 있고, 스키는 오직 스키장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존엄실천역량은 존엄을 캐물으며 실제로 행동하는 존엄실천의 장에서만 그 힘을 강화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이미 벌써 존엄한 존재이기에 존엄실천의 힘은 새롭게 형성된다기 보다는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힘이 회복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을 이야기하면서 ‘더 근원적으로 대상화된 존엄’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는 무한한 존엄과 관계해야하며, 이러한 존엄실천은 오직 존엄실천의 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다. 존엄실천은 존엄을 캐물으며 수행하고자 하는 존엄실천의 장에서만 경험되고 드러날 수 있다.

5. 존엄실천은 도래할 존엄을 지향한 실천이다

존엄실천은 존엄을 지향한 실천이다.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은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성실한 노력과 진심을  다한  열정으로 마침내 언젠가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존엄실천은 도래할 존엄을 지향한 실천이다. 존엄은 언제나 도래할 존엄으로 우리와 관계맺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삶의 조건과 환경이 보장될때 자신은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단언한다면, 그것은 3가지 차원에서 오류를 갖게 된다.

첫째는 ‘대상화의 오류’이다. 존엄은 감히 범할 수 없기에, 지금 이 삶을 존엄하게 보장할 수 있다고 단정한다면,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을 대상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둘째는 ‘종결화의 오류’이다. 존엄은 감히 범할 수 없기에 어디가 끝이라고 경계를 지을 수 없다. 감히 범할 수 없음은 무한의 차원으로 무한의 무한화로 이어지기에 감히 범할 수 없음을 무한하게 캐묻지 않고,  어떤 지점에서 멈춰서 이러한 보장적 조치가 존엄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을 중단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셋째는 ‘독단의 오류’이다. 존엄은 감히 범할 수 없음인데, 내가 무슨 능력으로 지금 이러한 보장적 조치가 존엄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존엄한 삶이라고 단언하다면,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독단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동그란 네모’라고 내가 말한다고 해서 동그란 네모를 실제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감히 범할 수 없는 무한의 차원을 의미하는 존엄을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정신승리의 맥락에서 이러한 보장이 충족된다면 나는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어떤 순간에 온 몸으로 강렬하게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한 삶을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경험으로 흘러가는 것이지, 존엄경험 자체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진심과 열정을 다한 실천으로 성취하거나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엄이 아닐 것이다. 감히 범할 수 없음을 그 핵심 특징으로 내재하고 있는 존엄은 하나의 이정표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존엄은 영원히 캐물어갈 수 있는 힘을 가능하게 하는 정북향(true north)으로 우리의 실천을 지속하게 할 것이다. 존엄실천은 ‘물음의 n승’으로서 캐물음을 통해서 수행되며, 그러한 존엄실천을 통해 우리는 맥락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존엄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존엄을 완전하게 소유하거나, 완벽하게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을 실천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실천가와 활동가로서 (1)우리가 가고 싶은 길이며, (2)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이며, (3)우리가 마땅히 가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존엄실천역량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존엄실천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을 왜 실천가와 활동가로 인식하고 호명해야 하는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끝.SIG

* SIG보고서 다운받기  ->  SIG보고서_존엄실천을 위한 캐물음의 역량_제18호_2021년5월10일_S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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