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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에 힘이 되는 실천용어사전 1

실천가에게 힘이 되는 철학

실천의 힘을 위한 실천용어사전 1

철학적 물음, 존재, 존재자, 우리는 차이다, 실천, 존엄, 뿌리내림, 존엄한 주권적 주체되기

1. 철학적 물음: 철학적 물음이란 만물의 근원과 기원, 만물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존재자)을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서 존재자체(존재)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그렇기에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자체로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시원, 기원, 근원 혹은 창조주, 조물주의 이미지로 사유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만물의 본질로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기원이자 근거인 존재는 존재자에 비해 더 우월하고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그래서 존재자에 비해 비대칭적이고 위계적인 힘을 가진 그 무엇으로 이해되었다. 존재는 신이고 존재자는 인간이며, 존재는 본질이고 존재자는 현상이며, 존재는 목자이고 존재자는 양인, 그래서 부모는 존재고 자녀는 존재자이며, 선생은 존재이고 학생은 존재자이며, 리더는 존재이고 직원은 존재자인, 정치가는 존재이고 국민은 존재자인 이러한 예속과 복종, 순종과 충성의 권력관계가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어 왔다.

존재와 본질을 기원이자 근원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사유방식은 지난 2천5백년 동안 철학의 물음으로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존의 존재물음을 변형하고자 한다. 존재와 본질을 기원이자 뿌리로 생각하는 사유의 이미지에 균열을 내고, 전복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존재자를 더 이상 존재의 예속된 대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존재자는 존재가 거주하는 장소이기에 존재는 더 이상 존재자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다. 존재자는 존재의 집이며, 존재는 존재자가 존재하는 곳에서 존재하며,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지만, 존재가 뒤에서 조정하고 통제하는 총체적 관리자가 아닌, 존재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존재는 존재와 상호공속적인 관계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이해는 존재자에 비해 비대칭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왔던 기존의 존재물음에 균열을 내고 전복을 일으키는 것이다. 존재우위에 근거한 존재물음을 해체하는 것이 실천가의 역할이고 사명이다. 실천이란 모든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 대한 균열이고 전복이고 해체이다.

2. 존재 :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하는 힘으로서, 존재이해와 존재물음을 수행하는 존재자를 통해 자신을 밝히 드러낸다. 존재는 존재자만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통해서도, 자연자체를 통해서도, 존재자의 언어를 통해서도 자신의 존재의미를 드러낸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이미 벌써 존재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존재는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 존재한다. 존재의 일의성이 우리에게 주는 실천적 의미는 인간의 평등, 존엄성의 평등이다. 비록 우리가 가진 모든 삶의 조건은 불평등하고 다양하고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모든 인간은 존재가 거주하는 집이라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감히 범할 수 없는 무한으로서 존엄한 존재가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는 집이라는 점에서 동등한 존재의미를 갖는다.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차이에 매몰되어서, 존재자인 자신의 권력과 경험, 통찰, 안목, 전문성, 지식 등으로 ‘존재가 거주하는 집’인 타자 존재자를 장악하고 규정하고 관리하려 해서는 곤란하다. 문제는 우리가 날마다 되풀이되는 실천의 장에서 이러한 경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힘에 의해 우리의 존재의미가 무시당하고, 모멸당하고, 난처하고 참담하게 무시당하고, 설령 뿌리를 뽑히게 된다고 할지라도, 감히 범할 수 없는 무한으로서 존엄에 대한 자기인식과 자기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영향을 받겠지만 참혹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 스스로 주체적으로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자기존엄은 결코 파괴되거나,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다.

3. 존재자(인간 존재자) : 인간 존재자는 존재이해를 통해 존재물음을 수행하며 존재를 거주하게 하는 존재자이다. 인간 존재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존재가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며 은폐시키는 집이다. 즉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존재자가 언어를 통해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존재자체에 자신을 초연히 내어맡김으로 존재가 언어를 통해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존재사건으로서 언어의 사용은 존재자의 행위노력, 몰입, 열정으로 규정하고 장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즉 존재사건은 존엄하며, 무한이다. 그러나, 감히 범할 수 없는 무한으로서 존엄한 존재는 언제나 항상 존재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드러낸다. 존재의 존재방식은 존재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존재자는 언제나 존재하며,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존재를 닮았지만, 존재자체와는 다르다. 존재와 언제나 항상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자들 사이에는 유사성과 일치함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같음은 차이를 제거하지만, 존재자체와 존재자의 관계속에서는 언제나 차이가 존재한다.

상대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를 존재자 수준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존재자체와의 관계속에서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가 상대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다(시혜 혹은 자선, 기부와 나눔 등). 상대는 존재자체와의 관계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자인 나의 수준에서 존재자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규정하고, 파악하고, 판단하고, 장악하고, 관리하고, 이끌고, 지원하고, 따라가고, 촉진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상대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현존함에 초연한 내어맡김으로서 존재자인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4. 우리는 차이다 : 우리는 차이다. 우리는 하나일 수 없다. ‘하나’는 오직 하나로서만 가능하다. 둘 이상의 존재자들의 집합은 하나일 수 없다. 설령 존재자들 사이에 유사하다, 동일하다, 같다, 일치한다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동등한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꼭 같음으로서 하나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 그자체로서만 하나일 수 있다. 따라서 집합으로서 다중으로서 복수로서 우리는 차이다. 우리 안에는 유사함, 동등함, 같음이 존재하지만 꼭 같이 일치하는 하나자체는 아니다. 평등은 하나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등하고, 유사하고, 같은 의미를 갖는 수 많은 차이들로 존재한다. 우리는 ‘하나자체’로서 평등할 수 없고, 평등하지 않다. 하나자체로서 평등한 곳에서 우리 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 자체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평등하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존재의미, 감히 범할 수 없이 존엄한 존재라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존엄한 존재자로서 우리의 존재방식은 차이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차이다.

5. 실천.實踐.praxis.프락시스 : 생각한 바를 실제로 행함. 온전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생각한 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행해야’한다.

먼저 ‘생각한 바’란 생각하는 과정이 아니라, 생각한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생각의 결과물이다.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찾거나, 생각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거나, 생각하고 있는 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한 바’란 생각의 결과물을 의미한다. 그럼, 지금 당신이 실천가로서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무엇을 생각하였기에, 그것을 실제로 행하고자 하는가? 당신이 생각한 바로서 생각의 결과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일 수 있고, 본질이 드러난 목적일 수 있다. 혹은 본질이 드러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도달하거나 성취할 수 있는 목표일 수 있다. 어쨌든 당신이 실천하고자 하는 ‘생각한 바’는 무엇인가? 당신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한 결과물은 무엇인가? 당신이 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실천하고자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 바’의 내용이 설명되고, 생각의 결과물이 정리되었다면, 이제 그것을 ‘실제로 행해야’ 한다. 실제로 행함이란 가짜로 행함이 아니다. ‘실제’란 온 몸으로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그란 네모를 그리자’라는 생각을 하거나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그란 네모’를 실제로 그릴 수는 없다. ‘동그란 네모’란 실제화될 수 없는 생각한 바이다. 적어도 실천가에게 있어서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생각한 바’의 타당성은 헌법적 권리로서 표현의 자유나 상상의 자유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행위자체의 존중을 요청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실천가에게 있어서 생각한 바의 타당성은 생각의 결과물이 ‘실제화’될 수 있는지 여부이다. 그래야, 가짜로 행하지 않고,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행함의 방식은 천개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실천주체에 따라, 실천의 장에 따라, 실천을 위해 더불어 함께 협력하고 있는 시민주체들의 조건에 따라, 그리고 실천의 장에 영향을 미치는 생태적·물리적 속성, 법과 제도의 내용, 행정과의 협력 등 다양한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캐물을 수 있는 영역은 온전한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여부이다. 실천의 결과에 대한 의미부여나 의미평가는 별개의 영역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실천한다는 것은 ‘생각한 바를 실제로 행하는 것’을 의미할 뿐, 실천의 결과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냐의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실천의 결과물에 대한 의미평가는 실천의 결과물을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실천 자체는 실천가의 의지로 돌볼 수 있는 차원의 영역이지만, 실천의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실천의 장에서 더불어 함께 협력하는 시민주체들과의 관계, 행정과의 협력,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대의 법과 제도의 내용, 실천의 장에 영향을 미치는 생태적·물리적 속성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임의적으로 실천의 결과물을 측정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다고 가정할 뿐이다. 실천가들이 과연 실천을 온전히 수행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실천의 결과물이 어떠한지에 대해 어떤 단일한 기준 혹은 복합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만약 실천의 결과물을 측정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다면, 실천의 장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위들을 측정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자’가 필요하다. 무게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저울’이 필요하다. 맛을 측정하든, 음질을 측정하든, 어떤 무엇이든지 그것을 측정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한 인간이 실천의 주체인 한 존엄실천의 결과물을 어떤 기준이 되는 도구로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측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도구적 실천’과 측정이 불가능한 ‘존엄실천’을 구별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도구적 실천은 셈할 수 있는 몫으로서 사회적 몫에 머무르는 실천이라면, 존엄실천은 셈할 수 없는 몫으로서 존엄의 몫으로서 존재의 몫을 지향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존엄실천’에 대한 성과평가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실천의 결과물을 판단할 수 있다면, 그러한 실천의 주체는 영혼을 가진 존엄한 인간 주체가 아니거나, 아니라고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인공지능이든 로봇이든 총체적 관리가 가능한 도구적 대상물이 실제로 행위를 했을 때만 측정과 평가와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한 존재로 보지 않고 더 가치 있는 이윤을 창출하는 성과도구로 여긴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원리나 경영방식을 야만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6. 존엄.尊嚴.dignity: 인물이나 지위 등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이 높고 엄숙함. 인간의 존엄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재로 인간을 대하라는 태도에 대한 언명이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 존엄한 인간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떤 정성스런 태도나 예의바른 태도 혹은 진심을 다하는 태도를 무력하게 하는 관계맺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엄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강렬한 은유는 ‘무한’으로서 존엄을 이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존엄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히 범할 수 없음’에 대해 한 걸음 더 파고들어가는 깊이 있는 캐물음이 요구된다. 이러한 캐물음을 위해 칸트가 [판단력 비판](253~260쪽)에서 ‘숭고’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참고해서 ‘존엄’의 관점에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단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존엄하다고 부른다. 단적으로 크다는 것은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 큰 것이다. 존엄은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아무런 인식원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다. 존엄하다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이 작은 것이다. 즉 존엄하다는 것은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각과 이성의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존엄하다는 것은 객관화할 수 있는 어떠한 규정도 가져서는 안된다.’(칸트, [판단련 비판], 253~260쪽.)

실천의 장에서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에 대한 물음은 실천을 이해하고, 실천가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존엄에 대한 생각한 바’에 근거해서 ‘실제로 행함’으로서 실천에 대한 이해를 온전히 수행하는 실천가라면 자신의 경험과 안목, 통찰에 자기 자신과 상대를 감히 가두려하지 않을 것이다. 존엄실천을 지향하는 실천가의 실천방식은 언제나 항상 ‘함께함’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함께함은 도래할 함께함으로 남아 있다. 함께함은 함께할 수 없다. 다만 함께함을 지향하는 함께함만이 가능할 뿐이다. 존엄실천을 지향하는 실천가의 실천방식은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끌거나(leading)’, ‘따르거나(following)’, ‘지원하거나(supporting)’, ‘촉진하지(facilitating)’ 않는다. 설령 사람들이 ‘당신은 지금 이끌고 있지 않느냐고?’, ‘당신은 지금 따르고 있지 않느냐고?’, ‘당신은 지금 지원하고 있지 않느냐고?’, ‘당신은 지금 촉진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을 침해하지 않고자하는 존엄실천은 도래할 함께함을 지향하며 그저 함께하고자 할 뿐이다.

7. 뿌리내림 : 실천가로서 우리의 본래적인 의무는 뿌리내림이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이웃과 더불어 함께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존엄의 몫이다. 우리는 존엄의 몫에 뿌리내림을 해야한다. 우리 삶의 비극은 바로 존엄의 몫으로부터 뿌리 뽑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외부의 힘에 의해 뿌리 뽑힘을 당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선택에 의해 존엄의 몫으로부터 뿌리를 뽑는 것이 비극인 것이다.

8. 존엄한 주권적 주체되기 : 실천가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은 ‘존엄한 주권적 삶의 주체되기’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적인 실천이고, 이러한 의지를 갖기 위해 실천의 힘이 필요하며, 실천의 힘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이 본래적으로 존엄한 주권적 주체임에 대한 자기확인과 자기확신이 필요하다.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이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자기물음을 통해 존재자로서 실천가는 실천의 힘을 회복하고 지속할 수 있다.

존엄한 주권적 주체되기에 있어서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과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한 존재자체에 대한 사유의 의미지일 뿐이다.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실천가에 의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실천가가 필요한 이유, 실천가가 존재해야 하는 시대적 책무이며 시대적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시대 존엄한 주권적 주체되기의 궁핍함은 온전한 실천을 수행하는 실천가의 궁핍함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힘있는 실천을 수행하는 실천가의 존재유무는 존엄한 주권적 주체되기와 공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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