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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통치(자치) 리더십에 대한 시론

자기통치(자치) 리더십에 대한 시론

‘자기통치(자치.自治.governance of self)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자기통치 리더십’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자기관리, 자기개발, 자기경영, 자기선택, 자기결정, 자기주도성과 자기통치는 어떤 점에서 다르고, 또 어떤 점에서 같은가?

자기통치란 단지 좀더 자극적인 개념으로서 자기관리나 자기개발, 자기경영을 넘어서 자기통치를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한가?

그래서 자기통치란 결국 타자의 권력에 예속됨을 자기화시키는 신자유주의의 혁신적인 경영방식에 불과한 것인가?

분명, 자기통치는 자기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고 주체되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존에 우리가 ‘자기~’라는 용어를 통해 추구해왔던 것과 동일한 비전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작동되는 방식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자기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자기관리, 자기개발, 자기경영을 추구하는 성과주체는 ‘Self as Private Being’으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주체이다. 그렇기에 자기관리하는 성과주체는 삶의 성취와 행복, 비전이 자기 자신의 삶의 유익과 만족, 보람, 성장에 한정되어 있다. 소위 ‘나마 아니면 돼’라는 의식에 영향을 받는 존재방식이다.

반면, 자기통치는 자기 자신을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에서는 외향적으로 자기관리, 자기개발, 자기경영과 차이가 없을 수 있지만, 타자와 더불어 살아감에 대한 분명한 실천적 지향,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주체임에 대한 분명한 자기인식을 가진 주체로 존재하기이다. 자기통치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타자와 더불어 본래적인 자기 자신(Self as Pubilc-Common Being.공동존재)’으로 존재하는 자기로 인식한다. 따라서 타자로서의 자기, 복수로서 단수인 자기, 타자의 인정으로서 자기인정, 타자의 통치로서의 자기 통치라는 타자와 자신의 관계를 상호공속적 관계로 받아들이는 존재방식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우리 자신을 자기통치하는 주체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효용, 만족, 성장이라는 미명으로 우리를 예속된 주체로 주체화하는 삶의 길로 유혹한다. 강제되거나, 어쩔 수 없이 내몰려가는 것은 이미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기에, 예속화된 주체로 주체화하는 길은 강제와 억압이 아니라 유혹에 대한 자기 선택, 자기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유혹의 핵심에 바로 먹고 사는 ‘생계’의 문제가 있다. ‘생계’를 매개로 작동하는 권력에 의한 종속과 예속이 우리 자신의 자기통치하는 삶에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그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가 본질적인 이슈인 것이다. 자본과 행정의 권력개입에 의해 우리는 언제나 예속화된 주체가 위험에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다. 우린 언제나 예속화된 주체로 상처입을 가능성인 것이다. 생계를 매개로 작동하는 권력의 이러한 ‘갑질’에 대해 우리는 더럽고 치사하다고 욕하면서도, 늘 가슴에 사표를 품고 다니면서녀도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예속화된 주체로 자신을 주체화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우리 삶의 위기는 우리는 예속된 주체로 주체화하는 갑질이 도처에 만연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문제임을 알고 있고, 본질적인 문제인을 인식하고 있으며, 아울러 벗어나서 나아갈 방향도 알고 있지만, 차마 그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분명 우리에겐 힘이 부족하다.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궁핍한 삶의 힘이 문제인 것이다.

그럼, 궁핍하고 허약한 삶의 힘을 어떻게 키울 것이며, 회복하고 강화할 것인가?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자기통치는 헌법 1조2항에 근거하여 모든 삶의 시.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주권적 삶의 주체로 인식하고 돌보는 행위방식이다. 헌법에 명기되어 있다고 자기통치하는 주체되기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지속적인 자기실천과 자기투쟁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수많은 고통의 값지불과 댓가를 감당해야 한다.

어쨌든 자기통치하는 주체되기를 위해서는 삶의 순간 순간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부문과의 관계속에서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주목하는 존재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란 언제나 타자와 더불어 본래적인 자기자신으로 존재하는 자기(self as public-common being)이기에, 주권적 주체로서 자기는 언제나 복수로 존재하는 자기이다. 복수로 존재하는 주권적 주체로서 자기는 자본권력, 행정권력, 정치권력, 사회권력 그리고 드러나 있는 혹은 잠재되어 있는 모든 권력관계(미시권력, 거시권력을 포함하는)에 민감하게 깨어 있는 자기이다. 아울러, 타자와 더불어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기라는 자기인식과 자기돌봄을 넘어 실천적으로 타자와의 연대, 공동체와의 연대와 협동을 통해서 우리를 예속된 주체로 주체화하는 권력에 비판적인 물음을 던지고 저항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권력을 부정하고, 비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제 어느 순간에 우리를 예속된 주체로 주체화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위험성에 대한 민감성으로 자기실천을 하고, 타자와의 연대와 협동의 실천을 하자는 것이다.

타자와 더불어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기통치하는 주체는 ‘이런식으로, 이렇게, 이런 사람들에게 통치당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을 멈추지 않는 주체이다.  자기통치하는 주권적 주체되기란 이런 삶의 방식, 존재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자기통치하는 주권적 주체로 살고 있는가? 살고자 하는가?

이것은 판단과 평가를 위한 물음이 아니다. 이 물음은 우리 자신과 타자에게 지속적으로 삶의 힘을 생성하게 하는 물음이다. 지금 Yes/No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쯤 Yes가 될 수 있을지도 중요하지 않다. 죽음 조차도 나를 지배할 수 없는 온전한 자기통치하는 주체가 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어야할 물음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의문은 타자의 통치와 외부의 지배하는 권력에 예속당하지 않으려는 자기통치하는 주체되기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그렇게 무한한 캐물음을 할 수 있는 힘은 어떻게 생성할 수 있는 것인가?

왜 ‘자치’가 아니라 ‘자기통치’인가? 우리 시대 가장 상처입은 개념이 바로 ‘자치’이다. 비지배자유로서 ‘자기통치인 자치’가 되지 못하고, 허락된 조건아래에서 자율활동인 자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상처를 입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기통치로서 자치’의 온전한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 공동의 미래이자 임무이다. 상처입은 치유자인 ‘자기통치(자치)’를 실천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자의 삶을 그리고 공동체와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령 그 믿음이 헛되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그 믿음으로 또 하루를 살아가고자 한다.

끝. S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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