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샷 2014-10-17 오전 8.49.06

‘마을학(Science of Maeul)’의 정립을 위한 시론 – 마을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찰

마을학이란 무엇인가 – 마을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찰

양세진(소셜이노베이션그룹대표, 행정학박사)

1. 마을에 대한 ‘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을’은 사람들이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연결망의 한정된 지역으로 혹은 주체로서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살이의 공간으로 이해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마을’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하는 결과물들은 많이 있지만, ‘마을학(Science of Maeul)’ 자체에 대한 연구는 낯선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마을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마을학’을 정립하는 시도는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숙고 있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 성찰된 내용들이 체계를 갖고 설명되고 이해됨을 통해 지속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속을 통해 새로운 결과물을 재생산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학’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학’이 되기 위한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헤겔은 ‘학’이 가능하기 위한 본질적인 토대를 ‘존재’ 혹은 ‘본질’에 대한 탐구로 보았다. 변화하는 성질들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로 자신의 본성을 영원토록 지속시키는 보편적인 본질 자체에 대한 탐구가 학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신학은 신을 영원하고 보편적인 존재 혹은 본질로 보고 있으며, 경제학은 경제를 영원하고 보편적인 실재로, 사회학은 사회를 영원하고 보편적인 실재로 보는 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학은 마을을 영원하고 보편적인 존재 혹은 본질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학으로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렀다면, 마을을 영원하고 보편적인 존재 혹은 본질로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물음은 앞으로 많은 연구자와 실천가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작업의 긴 과정을 요구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마을’의 영원하고 보편적인 존재 혹은 본질로서 ‘마을’이나 ‘마을살이의 주체’로서 ‘마을주민’이 아니라 마을과 마을주민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이자 본질로서 ‘잘 삶(to eu zen, well-being life)’을 이해하고자 한다. 본질적인 존재로서 ‘잘 삶’과 존재자로서 ‘마을’과 ‘마을주민’은 서로가 서로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다른 한 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아울러, 마을과 마을살이의 주체로서 주민은 모두 존재자로 존재하며, 존재 자체가 아님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따라서 ‘마을’을 ‘학’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마을’의 본질인 ‘잘 삶’이 무엇인지를 캐묻는 것이고, ‘마을’의 본질이 어떻게 ‘마을’과 ‘마을주민’을 존재하게 하는지, 그 존재방식에 대한 치밀하고 엄밀하고 체계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접근되는 것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벌써 경험하고 있는 삶의 체험과 마을살이에 대한 상상, 마을살이에 대한 기억을 통해 종합적으로 접근될 것이다. 우리는 정든 마을에서 살고 있으며, 정든 마을에서 성장하고, 정든 마을에서 늙어가고, 생을 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마을의 본질을 본질적으로 직관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즉 ‘마을’을 ‘학’으로 이해하기 원한다면, 그 본질을 캐물어가는 과정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2. ‘마을’과 ‘마을주민’을 존재로 보는 접근의 한계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사물은 존재하고 있다. 즉, 없지 않고 있다. 모든 사물은 우리가 사유를 통해 이해하거나 지각을 경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 역시 우리가 사유를 통해 이해할 수 있고, 지각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마을길을 걸으며, 구석구석 다니면서 마을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어디까지가 우리 마을인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

하이데거 이후로 우리는 존재자를 존재케 하는 존재와 존재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명석(clear)하고 판명(distinct)’하게 이해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자세히 보면, 존재자로서 인간과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존재자를 존재케 하는 존재 자체의 존재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익명성으로 존재하는지, 주체성으로 존재하는지 우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존재방식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존재’는 사유와 물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며, ‘존재자’는 설명되고 이해되며 경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양자는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존재는 우리가 조작하거나 통제하거나 대상화할 수 없으며, 존재자는 우리가 조작하거나 통제하거나 대상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인간과의 관계방식에서 보면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마을과 마을주민은 존재인가? 존재자인가? 이 구분이 중요한 것은 마을이나 마을주민 중 어느 한쪽을 본질로서 존재로 인식할 경우, 다른 한쪽은 자연스럽게 존재자로 규정되면서, 존재가 마음대로 조작하고 대상화하고 지배할 수 있는 존재자로 전락하게 될 위험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기에, 마을과 마을주민이 존재인지, 혹은 존재자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마을을 존재로 보는 접근에 의하면, 마을이 존재론적으로 우선하기 때문에 마을살이의 주체로서 마을주민들은 마을을 위해 참여하고 봉사하고 희생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따라서 마을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삶은 뒤로 하고 마을을 위해 무언가를 우선시하는 것이 온전한 존재방식이 된다. 그러나, 일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접근이 갖는 3가지 한계가 있다.

첫째, 마을을 존재로 보고 마을주민을 존재자로 보게 될 경우 마을 전체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마을을 위해서는 마을주민들은 얼마든지 도구화되고 대상화될 수 있으며, 마을을 위해 조작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게 된다.

둘째, 마을주민들은 마을을 위해 참여해야 하는데, 이때 참여의 폭력성과 강제성이 노출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본질로서 마을을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내고 몸을 내서 참여하지 않게 되면 문제가 있고 하자가 있는 마을주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말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리고 내면적인 자기 동기와 공명에 의한 참여가 아니라 강제적이고 의무적이고 책임에 의한 참여가 지속될 때 이는 곧 참여의 폭력성과 참여의 강제성으로 연결될 위험성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을을 존재로 볼 경우, 공공성을 상실한 마을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다. 우리 마을만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위험에 매몰될 수 있다. 다른 마을에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우리 마을만 괜찮으면 문제없다는 왜곡에 빠질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존재는 그자체로 영원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을 존재로 보는 관점을 갖게 될 경우 우리 마을이 좋다, 우리 마을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으로 다른 모든 선택과 행위를 차단시키게 되며, 이는 곧 다른 마을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마을이 우주다, 마을이 세계다라는 경구를 많이 사용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근사한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모두 마을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 마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접근은 우리 마을에 화장장터가 들어서고, 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선다고 할 때 다른 마을들과의 관계 전체를 보지 않고 우리 마을에 피해가 오기 때문에 싫다고 하는 논리로 발전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지 마을이기주의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 마을이 우주고 세계고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합당하다고 하는 위험한 논리를 전제하고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최근 마을의 공공성을 고민하는 접근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마을주민을 존재로 보는 접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마을주민을 존재로 보는 입장의 기본 전제는 애초에 마을이 먼저 존재한 것이 아니라 구성주체로서 마을주민들이 모이고 연결망을 이루어서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에 엄밀하게 마을주민이 존재이고 마을은 존재자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 역시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마을주민들이 가족을 이루고, 가족들이 연결된 씨족을 이루고, 씨족들이 확장되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이해하면 충분히 가능한 논리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주민을 존재로 보는 이러한 접근 역시 3가지 한계를 갖고 있다.

첫째, 마을살이의 삶보다 개인적인 삶을 우선하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삶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마을은 그냥 주거지이고 주소지일 뿐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마을에서 30년을 살아도 마을살이가 아니라 그냥 마을에 있는 거주민에 불과할 수 있다.

둘째, 마을주민을 존재로 보게 되면,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마을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참여를 미루거나 회피할 위험이 있게 된다. 자유주의적 자유가 바로 이러한 오류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마을주민을 존재로 보게 되면, 마을은 살이의 공간이기보다는 참여의 대상으로 분리되게 된다. ‘마을지향 봉사’, ‘마을을 위한 참여’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는 바로 마을주민을 마을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하게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을학’의 정립을 위한 본질에 대한 탐구를 함에 있어서 ‘마을’과 ‘마을주민’ 모두 마을학의 본질과 존재가 되기에는 부적절하고 한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마을학’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과 존재는 무엇인가?

3. 마을과 마을주민의 본질로서 존재는 ‘잘 삶(to eu zen)’이다

마을과 마을주민 모두 본질로서 존재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럼, ‘본질’로서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스에 존재하던 수백 개의 폴리스(polis, 공동체)중 아테네를 포함해서 158개의 폴리스를 경험적으로 방문하고 연구하고 쓴 [폴리티카(politika) : 폴리스의 운영원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개인으로 살지 않고 공동체를 이룬 목적은 그냥 살기(to zen, just life) 위함이 아니라 잘 살기 위함(to eu zen, well-being life)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이 마을주민으로 살지 않고 마을을 이룬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잘 살기’위함이라고 본 것이다. 그냥 사는 것은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는 삶이며, 잘 사는 것은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 ‘이상’을 충족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다른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주운 폴리티콘(zoon politikon)’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을 ‘인간은 정치적 동물’으로 혹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이해하고 있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인간은 그냥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잘 살기 위해서 폴리스를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럼, ‘마을’이 더 본질적인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폴리스는 구성주체인 ‘폴리테스(polites, 폴리스에 속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주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폴리테스 역시 폴리스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가능하게 때문에 이 양자는 엄밀하게는 어느 한쪽이 우선하지 않으며, 아울러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리고 필연적으로 서로를 요구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양자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가치는 바로 ‘잘 삶’이다.

그럼, ‘잘 삶(to eu zen, well-being life)’이란 무엇인가? 를 물을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떤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충족하면 잘 사는 것이고 미달하면 못사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삶’이란 캐물음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지향적 가치이며, 물질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의 조건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잘 삶’이란, ‘영혼의 생기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잘 삶’으로서 ‘영혼의 생기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을 수 있는데, 이 역시 어떤 기준선을 성취하느냐의 여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캐물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지향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마을’이 정말 ‘영혼의 생기 있는 삶’을 온전하게 가능하게 하는 공간인지, 우리 ‘마을주민’들이 정말 ‘영혼의 생기 있는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캐묻는 것이 본질이고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과 마을주민은 그냥 살아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생기 있는 삶으로서 잘 살기 위해서 존재하며, 마을과 마을주민은 개발과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 정말 영혼의 생기를 갖고 잘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을과 마을주민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탁월하게 잘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을과 마을주민의 본질로서 ‘잘 삶’은 캐물음의 대상일 뿐 포착되거나 파악될 수 없으며, 본질이 탁월하게 드러난 목적으로서 궁극적 목적 역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즉,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개념화하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잘못 사는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는 오직 캐물음의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며, 마을에서 마을살이의 주체로서 주민들의 실천적 소통을 통해 공명을 창출하는 그때그때의 순간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공명을 창출한다는 것은 합창단이 아름다운 화음을 창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연습을 통해 아무리 탁월한 화음을 창출한 합창단일지라도 다음 무대에서는 또 다시 새로운 연습을 해야만 화음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지, 한번 창출되었다고 해서 그 화음이 언제나 소리만 내면 창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마다의 실천적 소통을 통해 논의하고 합의를 도출해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을이 성장하고 마을주민의 삶의 욕구가 지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한 번의 공명 도출을 어떤 심급의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마을과 마을주민의 본질을 잘 삶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마을을 획일적인 개발로부터 보호할 수 있으며, 마을주민의 삶을 어떤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판단하는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

4. ‘마을학’의 3가지 핵심 요소

이로써 마을을 학으로 가능하게 하는 3가지 핵심 요소를 검토해 보았다. 하나는 존재이자 본질로서 ‘잘 삶’, 존재자로서 ‘마을’과 ‘마을주민’이다. 그리고 이 3가지 요소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궁극적 목적으로서 ‘잘 삶’을 지향하고 있다. 한편으로 ‘잘 삶’, ‘마을’, ‘마을주민’은 순환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우리가 어떤 마을을 보면서 이 마을은 훌륭하다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유 속에서는 ‘마을’의 본질로서 ‘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을’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마을주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실천적으로 경험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순환의 과정을 밟아 나가야만 한다. 이것은 응급조치도 아니며, 결함도 아니다. 이러한 길을 밟아 나간다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순환의 길을 잘 따르는 것이 ‘마을학’을 위한 사유를 굳건히 다지는 행위가 된다. 잘 삶을 통해 마을과 마을주민을 이해할 수 있으며, 마을과 마을주민들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 잘 삶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순환을 이룰 뿐만 아니라, 이러한 순환이 마을학을 온전하게 정립하기 위한 방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마을학은 잘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마을이 구성되고 운영되며, 마을주민들이 살이의 주체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을학이란 본질로서 ‘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캐물음을 통해, 이론과 실천이 역동적이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접근을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끝.

(* 본 원고는 월간[주민자치] 2014년11월에 요약정리되어 실린 원고의 전문입니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